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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Enduring Love - Ian McEwan(1998)

지루함이 졸음처럼 찾아오던 화요일의 이른 오후
나는 우연히 찰리 푸스의 'river'라는 곡을 듣게 되었다.
읊조리듯 나른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우울함을 배가시키는 미디음과 그의 환영들처럼 보이는 코러스까지 -
멜로디가 한껏 나를 휘어잡았다. 아무래도 이 노래는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나를 놔주지 않을 성싶었다.
Maybe you should fall
That's what rivers do
Cause when you're in love
You don't mind a different view
훅인지 후렴일지 모를 이 멜로디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찬란함마저 느끼던 이 선율이 일요일 저녁인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린다. 개인적인 사랑의 기억을 헤집던 선율은 이제 저만의 사연과 슬픔을 이끌고 내가 읽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이런 사랑'에 묵직하게 스며들었다.
때는 2005년, 내가 한참 셜록 홈스와 그에 관련된(혹은 파생된) 작품들을 뒤적거리던 와중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등장한다는 소식에 개탄하고 있었다. 셜록 홈스의 오마주이자 안티테제, 아서 코난 도일에서 시작하고 이언 플레밍이 완성한 품격 있는 플레이보이. 1대 숀 코네리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흑발에 어두운 홍채라는 일종의 룰이 깨어진 것이, 원리주의자(...)인 나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도 1대 배우인 숀 코너리였기 때문에, 다니엘 크레이그는 그에 비하면 너무나 달랐다. 그가 가진 금발에 벽안은 제임스 본드보다는 존 왓슨에 가까운 것이었고 오페라의 유령으로 치자면 라울 드 샤니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작해서 그의 커리어를 뒤져보다 알게 된 영화가 있었다. 'Enduring Love'라는 영화였다. 2004년 영화였고, 당시엔 최근 영화여서 원어로 된 자료밖에 없었다.
제임스 본드로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낯선 남자가, 그것도 안경을 끼고 나온다. 대충 퀴어 영화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 옆에 서 있는 위태로운 금발의 남자가 풍기는 위험함이 심상치 않다. 요전의, 혹은 이전의 퀴어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도 온전치 못한 것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행복하고 가볍고 따뜻한 작품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나의 구미를 당기게 만들진 못했다. 영화를 대충 훑어보더라도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목부터 사랑을 운운하는 것치고는 두 사람의 사랑보다도 다른 것들에 더 치중하고 있었다. 기존의 퀴어 영화가 갖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치여서 고통스러워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마치 '사랑'이 그 자체로 재앙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흘렀다. 지금이 2022년이니까 17년이나 흐른 것이다.
그 와중에 참 많은 퀴어 영화들을 봐왔다. 그뿐이랴, BBC의 셜록도 보고, 하우스, M.D. 도 보고 유령신부도 보고 - 이건 아니 보니만 못했으리라 - 이 외의 셜록 홈스 작품이며 코드들을 많이도 봐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 그 당시의 지루함과 원리주의자스러운 고집이 다 헤질 정도로 말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는 007 시리즈는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을 제외하고 모두 챙겨 보았다. 사랑에 연연하는 제임스 본드라니,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본드의 다른 모습이다. 그는 늘 새롭게 다른 여성을 만나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한 여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성은 제임스 본드의 내면 뿐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이번 다니엘 크레이그 버전의 007 시리즈는 하나의 거대한 사랑 대서사시를 보는 기분이다. 물론 일찍 떠내보낸 여성을 가슴에 묻고 앞으로 나아가는 남성의 클리셰가 희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남자가 제임스 본드라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이다.
007 이야기는 이쯤으로 남겨두고, 정말 우연히도 나는 다시 Enduring Love라는 작품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려면 미국 드라마 'Elementary'를 빼놓을 수가 없다. Enduring Love의 또 한 명의 남자 주인공, 리스 이판이 이 작품에서 '마이크로프트 홈스'로 나온다. 그 텅 비어 보이는 눈동자, 그러나 신비롭게도 그 눈동자는 위 쌍꺼풀의 이완과 수축에 의해 좀 더 진지하고 날카롭고 애처로워지기도 한다. 리스 이판은 그런 배우 같다. 내가 그동안 이런저런 작품 속에서 잠깐씩 봐온 그의 모습은 대부분 제정신이 아닌 역할들이었지만 마이크로프트 홈스를 연기하는 그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그의 연기는 마크 게티즈의 연기와는 또 다르다. 번지르르하고, 음습하고 젠체하는 그의 연기와는 다르게 리스 이판의 마이크로프트는 건조하면서도 격조 있고, 간결하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마치 여백 같다. 셜록 홈스를 연기하는 조니 리 밀러가 좀 더 난리를 칠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들어준달까. 그래서 그가 연기하는 마이크로프트의 똘끼는 늘 멋진 문장 끝을 마무리하는 펀치라인 같다. 그가 사고를 칠 때에는 늘 홈스가 모든 난리를 친 뒤 기진맥진한 상태이니까. 그런 점이 또한 마이크로프트의 캐릭터와도 맞닿아있다. 계산적이고, 지적이며 늘 지쳐있지만 - 그러나 본래 그 성질은 '게으름'이리라 - 바라는 것을 뒤에서 계획하고 조용히 가져올 줄 아는 냉철한 사업가. 그러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 오래전, 안경을 낀 제임스 본드 배우 뒤에서 비 맞은 개처럼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모습을 겹쳐 보았을 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그 영화를 찾아보았다. 물론, 한글 자막은 없었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요전에 느낀 내 감상이 아주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영화 초반에 보란 듯 터지는 사건, 그 사건의 여파로 발생한 불행한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의 표현은 영화에서 꽤나 섹슈얼하다. 리스 이판의 표현과 음성, 태도가 그러하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캐스팅 그 자체가 그러하다. 원작을 읽은 이제야 생각하지만 원작의 '조 로즈'는 그토록 매력적인 남성은 아니다. 오히려 사망한 중년의 교수 로건이 더 매력적이었을 터다. '덩치도 크고 머리도 벗겨진 아저씨'인 그가 영화에서는 안경 하나 걸친 매력남으로 변했으니 리스 이판과 다니엘 크레이그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아주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그만큼 폭력적이었다. 영화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을 계속해서 충돌시킨다. 물론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활자로 갇혀있던 캐릭터들이 영화에 재현되다 보니 더욱 강렬하게 그런 폭력성을 느끼게 된다. 거친 말투, 밀어내는 손짓,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흩어져 나가는 사랑의 노래, 흔들리는 눈빛, 마지막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기 힘든 키스신까지도... 영화는 충분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게 '퀴어'영화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본다면 원작 소설은 참으로 허무맹랑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랑. 원제인 Enduring Love를 직역하지 않고 이런 제목을 가져다 넣었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괜찮은 제목 같다. 물론 Enduring Love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사랑을 견뎌내기'와 '영원한 사랑'이라는 두 가지 의미이다.
우리나라 번역판인 '이런 사랑'은 2008년 초판 되었다. 물론 이제 와서 소설을 찾아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중고밖엔 남아있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중고를 내 손으로 들인 것에 무척 만족하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너무나 많은 것이 소설에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보니 서두가 너무나 길었다.
소설은 사랑에 대해서 묻고 있다. 물론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내가 느낀 것은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추구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있어서의 '이기성'이라는 것이 너무나 날카롭게 이 소설에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충격적 사건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발병한 '드 클레랑보 증후군' 때문에 조에게 빠져들게 된 제드 페리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그러나 그 이기성이 무척 묘하게 표현된다. 그가 표현하는 사랑은 '에로스'적인 것과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가 그토록 찾는 주님과 신에 대한 경애는 그보다 '플라토닉'하거나 '아가페'적인 사랑에 가깝다. 다만 그 타깃이 조라는 한 개인으로 좁혀졌을 뿐이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후에 소설에 부록으로 첨부되는 제드 페리에 대한 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는데, 그는 조에 대한 성적인 욕망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했고,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고 있지 않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거기 덧붙이기를, 대부분의 드 클레랑보 증후군을 앓는 남성 환자들은 제드 페리와 같지 않으며, 애정의 대상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압적인 계획을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 이뿐 아니다. 소설 내에서도 제드 페리의 괴롭힘에 짜증이 난 조는 대놓고 '그렇다면 자네는 나와 관계가 하고 싶은 건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제드 페리는 무척 망설인다. 마치 그것이 그의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참 기묘하고 웃긴 상황이다. 조의 질문은 '오빠는 나 이러려고 만나?'같은, 상투적인 말처럼 느껴진다. 육체적인 관계가 사랑의 전부인 것이냐고 반문하듯이. 제드 페리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그러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제드 페리의 소름 끼칠 만큼 섬세하고 부드러운, 염려하는 듯한 애처로운 사랑의 모습이 여기서 더 빛을 발한다. 그는 언제나 기다린다. 우두커니. 물론 소설 후반에 가서는 공격적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마저도 끝은 자멸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손을 써서 조를 처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치사하게 남의 손을 서서 해치우려고는 했지만.
여기서 조금 더 벗어나 사랑의 이기성에 대해 더 첨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 이기성이란 제드 페리를 통해 가장 많이 드러나지만 사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오래된 부부인 주인공 조와 그의 아내인 클라리사의 갈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의 열렬한 육체적 사랑과 애정표현에도 그들이 가끔 겪는 갈등은 사실상 서로의 사랑이 지니는 이기성으로부터 발현된다. 과연 그것은 개인적인 욕구 - 클라리사의 경우는 힘든 하루에 대한 위로, 조의 경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받고자 하는 바람 - 였지만 이 또한 자신을 사랑해 주는 대상에게 자연스럽게 바라는 점들이지 않은가.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해주는 것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원해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주변 상황이 둘을 몰아붙인 셈이지만 그 때문에 둘은 갈등하고 결국 큰 틈이 벌어지게 된다.
물론, 제드 페리가 그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사랑하는 모습'은 참 다르다. 그는 처음에 조에게 냅다 전화를 해대고 무작정 밖에서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 그는 조와 대화를 하면서 차츰 그 방법을 바꿔나간다. 조가 만지던 쥐똥풀을 만지작대며 그를 느끼거나, 멀리서 그를 바라보거나, 그에게 찬찬히 자신이 느끼는 바를 편지로 쓰는 것 말이다. 물론 하나같이 조에게는 고통스러운 것들 뿐이었겠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시선에서 이러한 행동은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자신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맹목적인 애정으로 보이는 그것이 조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다. 흔히들 사랑은 '변한다'라고 하지 않던가. 한데 이 '영원한 사랑'중 으뜸인 제드 페리의 사랑은 그 스스로 변모하며 대상을 바꾸지 않고 존재하려 애를 쓴다.
한 편으로는 참 재미있는 일이 있다. 사랑이라는 존재가 비단 이 조와 제드, 클라리사에게 한정되지는 않는다. 소설에는 더 중요한 인물이 한 명 더 존재한다. 바로 기구 사건의 피해자이자 '선한 자'이자 소설 처음과 끝을 빛내는 '로건'이 그러하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희생적이었던 로건의 행동, 그리고 그를 믿지 못하는 - 지금 생각해 보면 믿고 싶지 않아 했던 - 그의 아내 진.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열기구에 끝까지 매달렸던 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무엇을 견뎠던(Enduring) 것일까. 로프의 끝에서, 혹은 그 로프를 처음 잡은 그의 손끝에서 그의 마음을 움직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혹여나 그가 본래 품고 있었던 자식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을 견뎌내고, 로프를 놓고 살았다. 로건은 그러질 못했다. 그는 사랑을 견뎌내지 않고 그대로 끌고 가 끝까지 그 로프에 매달렸다.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갈지, 내버려 둘지 알지 못한 채로.
결국 모두는 믿지 않는다. 믿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사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로프를 가장 먼저 놓은 사람의 정체이다. 물론 이 소설이 말하는 것은 그런 스릴러가 아니겠지만. 제드 페리가 조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조가 산 사람 중 가장 마지막으로 로프를 놓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 얼간이의 애정 버튼이 어느 것을 이유로 켜지고 꺼지는지는 당최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소설 내에서 조와 클라리사를 보면 두 사람의 갈등이 참으로 첨예하고 거칠고 난잡한 데 비해 제드 페리의 사랑이란 그의 소름 끼치는 문장력이 빛을 발하는 편지와 그의 행동거지를 통해 숭고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는 페리의 시점이고 조의 시점에서는 무척이나 무섭고 혐오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나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런 사랑에 나는 약하다. 아니, 나는 이런 화학반응에 약하다. 나는 사랑이 과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조 로즈의 견해처럼 사랑이라는 것이 분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제드 페리가 지니는 그 '드 클레랑보 증후군'이라는 것에 감정이 가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사람이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로프를 잡은 뒤, 자신을 얼마나 위로 들어 올릴지도 알지 못한 채, 떨어질지도 모르는 공중으로 계속해서 올라간다. 제드 페리는 그 끝에 매달려 조를 바라본다. 언젠가 그 열기구 안에 자신과 조 둘이서 주의 사랑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가득 차면서 말이다. 참으로 이런 사랑은 어떠한가. 머물고, 바라보고 느끼고 해석하고 흐느끼고 안타까워하고 마침내 죽일 듯 노려보고 미워하다가 지쳐 쓰러지고 품에서 칼을 꺼내 자신의 목을 그어버리고 싶어질 만큼의 미칠듯한 그런 사랑 말이다. 그래서 참으로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사랑은.
Maybe you should fall
That's what rivers do
Cause when you're in love
You don't mind a different view
끝없이 흘러가는 강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그저 떨어질 뿐이고 그것이 강이 하는 일이니까.
그것 말고는 다른 생각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그러나 제드 페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맙고, 나를 받아 줘서 고맙고, 우리의 사랑을 위해 내가 한 일을 인정해 줘서 고마워요. 어서 내게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 줘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믿음은 기쁨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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