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장편/미완]
반사회성 성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反社會 性格障碍]
- 성격장애 군집 중 하나로 사회적 규칙과 법규를 어기고 무시하며 타인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한다. 여러 가지 반사회적 행동과 범죄를 일으켜 사회불안요인으로 일컬어지며 상대방의 감정을 공유할 줄 모르고 애정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전문가를 비롯한 대중 사이에서 종종 '사회병질자(Sociopath)'와 '정신병질자(Psychopath)'라는 용어와 혼동되어 쓰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형성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유년기에 품행장애로 진단받는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
"셜록, 잘 들으렴." 울렁대는 암흑 사이에서 경건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신의 음성처럼 어디서 들려오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아무리 도망치고 귀를 틀어막아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신체의 어느 일부도 느껴지지 않았고 눈이 있는 기분이나 코가 있는 기분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에 비할 만큼 거대한 허탈감이 느껴졌다. 타이르고 달래는 말투였음에도 끝없이 괴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하면 마치 생각 자체를 절단하려는 듯 음성은 다시 그를 불러왔다.
그 음성으로 겨우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다.
어깨...그래, 어깨가 있었지. 잠시 생각했다.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어깨의 존재를 일깨웠다. 그렇다면 팔도, 팔을 지탱해주고 어깨를 잡아줄 몸뚱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머리도...잘 하면 다리도...무슨 말이든 자신을 다잡기 위해 애를 썼다. 달래는 말투 같은 건 애초에 아무 쓸모도 없었다. 당장에 중요한 것은 이 지독한 음성을 자신의 청각 밖으로 내모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눈을 떴다.
하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몸뚱이는 190이 넘는 큰 체구로 침대 위에 놓여 있고 마치 포장리본이라도 된 것처럼 너절하게 땀에 젖은 자신의 머리가 있을 뿐이다. 격렬한 싸움 끝에 돌아온 전사처럼 셜록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도저히 피로라곤 풀리지도 않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피곤한 이유를 굳이 찾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리번거린 시선이 멈춘 시계가 새벽 다섯 시를 가리켰다. 그나마 합리적인 이유라는 생각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꿈'과 같이 흥미 없는 소재에 재미를 느끼지 않을 뇌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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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부터 아래층의 소란을 듣고 있자면 예민하진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악몽에 시달리는 존은 두 눈을 번쩍 뜨는 게 예사였다. 셜록에 대해 존보다 오래 알았을 테지만 그의 잠버릇이나 기상시간에 대해선 결코 잘 알지 못할 허드슨 부인도 처음 며칠간은 셜록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문제의 새벽 다섯 시에 준비해 둔 책을 읽거나 두 사내가 곧잘 들기 좋아하는 차와 비스킷을 협탁 위에 준비해 놓은 채 즐기곤 했다. 그것은 그녀가 결심한 것들 중 가장 현명하며 신속한 조치였다. 문제가 되는 인물의 됨됨이를 보자면 확연히 그러했다.
존에 대해 지난 거주지에서 소위 ‘이웃’이란 사람들은 그가 막상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 때문에 잠을 설치는지도 몰랐거니와 실제로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는지에 대한 사실조차도 몰랐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잠버릇에 대해 별다른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잤고 또한 조용히 놀라며 깨어났다. 기껏해야 숨을 크게 들이쉬는 특유의 버릇만 나타날 뿐 셜록처럼 거실을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거나 부엌에 들러 냉장고에 오리고기 대신 화학약품을 넣어놓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도 자신의 옛집에서 홀로 깨고 잠드는 일을 반복했더라면 상관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셜록의 동거인이었으며 고로 그러한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허드슨 부인은 홍차와 비스킷, 그리고 신파극이 가득 들어간 책 한권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존은 그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지난 며칠간은 몇 번이고 셜록에게 부탁 아닌 부탁도 해왔다. 때마다 '알겠다.' 혹은 '알았다는 말을 써 놓고도 셜록은 본인의 약속을 망각한 채 새벽 다섯 시에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일어나는 일 자체는 모르나 그는 자신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괴짜였기에 문제였다. 최후에는 소리까지 질러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셜록의 무관심이 최근 한 달 가까이를 존의 인내심 테스트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알고 보면 같은 장소에만 산다는 것이 비슷할 뿐, 성품의 비슷함으로 거리를 재자면 지구와 목성보다도 더 멀리 나올 이 사내들이 어떻게라도 견디고 사는 - 전적으로 존이 그러하건대 - 사태에 대해 시간이 갈수록 강한 탐구욕을 내뿜는 인간은 다름 아닌 마이크로프트였다. 그는 자신의 '걱정거리'에 대해 말을 꺼내고 그에 대한 맞수로 존이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를 조금은 '남다른' 사람으로 인지했으며 어느 정도는 괴짜에 엉뚱한 자신의 동생과 구색을 맞추어 탐정놀이를 즐겨주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아닌 기대에 차 있었다. 서른 줄에 다다른 사내들이 결혼이나 일에 대한 관념도 없이 마치 허송세월을 멋들어지게 노래로 풀어내는 록 가수들처럼 살아간다는 게 형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니었지만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요는 '어머니'의 큰 우려가 장남인 그를 언제나 동생 곁에 두도록 몰고 나간 것도 있었다.
허나 존에게처럼 주거비용을 대주겠다는 그의 제안이 결코 처음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의 태도에서부터 익숙함이 묻어나고 있었기에 존도 알았을 테고 셜록의 무심한 한 마디에 역시나 굳어진 상식이겠지만 이전까지의 인물에 대해 존이 알 리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자면 이것은 셜록을 향한 마이크로프트의 진짜 '걱정거리'였고 때마다 나가떨어지는 인간들에 대해 붙잡아놓을 수 있는 최후이자 최선의, 그리고 전처리기 같은 계획이자 마이크로프트의 '지원'이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느냐의 여부에 있지 않았다. 셜록과 붙어있으라는 협조부탁의 의미로 어느 정도 비용을 대겠다는 감언을 흘리고 무심한 인간들이 그 미끼를 물고 나면 마법처럼 일주일 안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마는 것이다(실은 그 '무심한 인간들'이 셜록의 곁을 말도 없이 떠나갔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그의 지원을 거절한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개인주의적이라고 해서 - 혹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 셜록의 '지나친' 개인적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포괄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동거하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마이크로프트는 있는 대로 숨을 죽이고 지극 정성으로 빚은 도자기가 구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인이라도 된 듯 잔뜩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 그리고 때로는 자신 앞에 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 그 모든 것들을 동원해 마이크로프트는 존의 행동변화와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후에 존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허드슨 부인이며 레스트레이드, 심지어는 항상 마주치며 이제는 '친구'라는 이름으로도 어색하지 않을 셜록조차 모르는 존의 이야기를 마이크로프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심리상담가를 자르라는 그의 말이 더없이 설득력 있어 보이는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은 그 동안에도 계속해서 일어났다. 낮이면 뛰어다니고 밤이면 돌아와서 잠을 자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허나 둘은 결코 지치지 않았으며 셜록이 더욱 그러했다. 근처의 좋은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흥미로운 사건들을 뒤쫓고 범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뒤를 캐는 작업은 얼마든지 스릴 넘쳤기에 존은 어린 시절 보았던 콜롬보 반장이나 그 어떤 범죄드라마 상식이며 인물들을 들먹이지 않는다 해도 순순히 셜록을 따라나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람을 죽이는'일에 흥미가 있는 것처럼 되어버려 난감했으면서도 남자 특유의 '모험을 향한 두근거림'은 이렇게까지 나이를 먹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의 아픔이니 스릴의 그리움이니 무엇을 들먹여도 결과는 그러했고 더군다나 옆에 있는 동료란 인간은 더욱 그 역할에 충실하니 그로서 눈을 내리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치지 않는 나날 속에서 드디어 마음이 맞는 '조수이자 동료'를 얻은 셜록은 허드슨 부인에게 빼앗긴 해골을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줄 수 있거니와 자신이 물어보면 적당히 상식선에서 -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지루한 - 답안을 꺼내 이벤트를 좋아하는 그의 성미를 더욱 돋우고 툭하면 질문하며 작은 탐구정신까지 있는 최고의 동거인이 생겨난 셈이었다. 마음 같아선 마이크 스탬포드에게 감사의 표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눈앞에는 사건과, 그의 특별한 '조수'가 있으므로 - 또한 그의 성미로 미루어보건대 - 그런 일이나 예의차림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활동적인 나날 속에서도 새벽 다섯 시에 느껴지는 악몽은 어쩔 수 없었다. 불면도 아니고 숙면도 아닌 이 애매한 상황 속에서 셜록은 항상 방황했고 답을 찾지 못했다. 탐구적이던 정신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잠에는 어떤 힘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것이었다. 눈을 감으면 겁이 나고, 그 피곤해져서 늘어져버린 한없이 생물학적인 팔과 다리들이 아무런 제구실도 못할 때 그는 아침을 기원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정작 근본적인 문제라면 - 어째서 그가 그 '목소리'에 그렇게나 괴로워해야 하는 가였다.
"타시죠. 왓슨 박사."
"이번에는 바로 찾아오셨군요." 부드러운 말투에 비해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존은 차의 본네트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말하였다. 동료의 형이라지만 같은 엄마라는 것을 빼고 보면 상당히 다른 느낌의 소유자였다. 훤칠한 키와 오묘한 표정은 마치 인형극이라도 보는 기분을 자아냈고 말하는 끝마다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간교하고도 비아냥대는 말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인물이 몇 달 만에 다시금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어쩜 그렇게 귀신처럼 시간을 지켜 나타났느냐 누가 묻는다면 존은 아마 한숨만 쉬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제 폰으로는 연락도 하지 않고요." 존은 시트에 몸을 뉘였다. 이전에 앉았던 그 느낌이 그대로 들어서 신기했다. 자신이 몇 달 전 앉은 바로 그 자리. 어째서인지 선명해져서 그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전처럼 그는 답이 없었고 단지 달라진 게 있다면 여비서가 사라져있다는 것이었다.
"...저기, 옆 자리에..."
"앤시아? 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녀가 동참할 수 없는 자리라서 말입니다." 알고 보니 운전석 옆자리에도 사람이 없었다. 어쩐 일인지 마이크로프트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존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좀 더...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니까요. 나에게 부하들을 입막음할 수 있을 좋은 기술조차 없다고 비웃을 거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내용이란 실로 그러하니 말이죠."
"무슨 말을 하는지...전혀..."
"몰라도 좋습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
말을 마친 마이크로프트의 차는 비오고 난 뒤의 런던 거리를 미끄러지듯 떠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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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부인!"
위층에서 들려오는 요란하면서도 강한 음성에 허드슨 부인은 금세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그가 로브를 두른 채 계단에서 내려오는 찰나였기에 허드슨 부인은 다시금 가려던 길에서 발을 내렸다. 며칠 사이로 아무 말이나 대화도 없이 중간층에 갇혀있다시피한 그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어떤 정돈도 하지 않은 그 모습은 흡사 거리의 부랑아 같은 느낌마저 자아냈다.
"셜록, 무슨 일이니?"
"방금 전에 문자가 온 것 같아서 말이죠. 차하고 비스킷을 좀 준비해주시겠습니까? 얼마나 걸릴 지모를 일이에요."
"이젠 너에게 내 입장을 말해주는것도 지쳤구나, 조금만 기다리렴. 준비하마." 허드슨 부인이 차를 내올 준비를 하는 동안 셜록은 잽싸게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바깥으로 나와 그나마 계단에서 허드슨 부인을 부른 것은 대단히 활동적인 일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문자를 받게 된 것으로 탄력 받아 나타난 효력이기도 했다. 그는 이제 당장 자신의 에너지와 지식을 모두 쏟아 붓고 사건을 해결하고 싶을 터였다.
한 동안 소란이 들려오던 찰나에 비스킷을 정리하던 허드슨 부인이 차를 내오기도 전에 올라갔던 것처럼 - 그러나 몰라볼 정도로 말끔해져서 - 셜록이 잽싸게 내려와 허드슨 부인에게 말하였다.
"부인! 존은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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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는 훨씬 나은 장소군요." 차에서 내린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내리기도 전에 텅 빈 건물을 스윽 훑어보았다. 외진 길가였지만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새로 지은 건물이 - 그러나 아무것도 꾸며지지 않은 상태에서 -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고 전면이 유리여서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도 훤히 보였다. 기껏해야 간편하게 마련된 사무용 책상과 의자 두 개 뿐이었지만 충분히, 현재 존에게는 순간의 긴장을 풀만한 멘트가 필요했다.
"들어가시죠. 왓슨 박사." 마이크로프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lock음을 누르며 친절히 말하였다. 역시 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밀고 존 먼저 건물 안에 들어섰다. 텅 빈 느낌과 전면 유리라는 점이 오히려 지금의 공간을 하나의 '갤러리'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번에는 마이크로프트 쪽에서 앉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존은 금세 눈치를 했고 마이크로프트는 작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약속한 듯이 그는 프론트 앞자리에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존."
운전대를 잡았을 때만 해도 '왓슨'이란 호칭을 붙이던 마이크로프트가 자신의 프론트 안 좌석에 앉자마자 호칭을 바꾸었다. 약간 놀라웠지만 존은 별다른 말을 달지 않았다. 외딴 장소에 들어온 자신이 그보다 훨씬 불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길을 걷던 그가 우연히 타게 된 차와 도착한 건물, 이 프론트 데스크와 의자 하나마저도 - 심지어는 공기까지 - 자신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낯설고 어색했다. 마치 마이크로프트처럼.
"...셜록과의 일을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뒤로 한껏 고개를 숙인 채 좌우로 의자를 돌려가며 마이크로프트가 물어왔다. 자세와 얼굴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마치 8살 아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끌고와서 한다는 소리가 겨우 '셜록과의 일'이라니...존은 어이가 없어 일순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습관처럼 어떤 말을 시작할 때에는 헛기침을 하는 편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이...셜록과의 일입니까? 괜찮다면 셜록에게 직접 물어봐도 좋았을 텐데요. 아니면 전처럼...저에게 전화를 하셔도 괜찮고요."
"오, 미안합니다." 마이크로프트는 금세 오른손을 들어 거부하듯 팔랑대더니 능글맞게 웃어댔다. "한 동안 박사님의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 전혀 잊고 있던 모양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셜록은 저에게 그리 협조적인 형제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한동안 노려볼 듯 바라보던 존은 금세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미 알 것 같습니다만...몇 가지 사건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러 분주히 뛰어다녔습니다. 이따금씩 위험한 일도 있었지만 지금 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아마도 하나 있다면 그건 전기세나 밀린 방세 같은 것이겠죠. 당신이 다시금 그것에 대해 제의할 수 있다면 말이죠."
마지막 말에는 약간 힘이 빠져 존은 습관처럼 자신의 입을 가렸다. 어딘지 자신이 빠지는 말을 한 것 같아 민망했지만 홈즈의 형이고 또한 마이크로프트 본인이 먼저 제안했던 내용이기에 충분히 꺼낼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존, 왓슨...정말이지 난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마이크로프트는 이번엔 실로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여느 사업가들이 보이는 가식적인 웃음이나 미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 몇 번 정도는 그저 재미로 그랬다고 치죠. 앞의 몇 사람들도 그러했으니까...하지만 존, 당신이 제아무리 아프가니스탄의 포탄 냄새를 마시고 돌아온 군인이라 할지라도 제게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함께 일하기도 힘들거니와 '동거'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인 내 동생하고 어떻게 살 수 있는 겁니까?"
"정말로 걱정하고 있거나 우릴 감시하고 있다면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왓슨은 잠시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마이크로프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진실성을 담고자 하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났다. "정말 별다른 것도 없었습니다. 우린 사건을 풀어나가고, 평소처럼 밥을 먹고 살았을 뿐이에요. 우린 - "
"그 누구도,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셜록은 당신에게 더욱 가까이 와 있는 건지도 모르죠." 마이크로프트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턱을 괴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존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심지어 별다른 직업이 없는 사람까지도. '미스터 홈즈 씨와 저는 아무래도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하기 일쑤였지요. '우리'라는 말은커녕 같이 섞이는 것조차 불쾌해 했습니다.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지요. 셜록, 제 동생이...결코 상식적으로 이해심이 있거나 배려감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요. 그들은 '동거인'을 원했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어떤 인물을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이크로프트는 다시금 물어왔다.
"만일 당신이 여기에 온 적이 있다면...믿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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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프트. 마이크로프트 홈즈 말입니다." 신경질적인 어조에 바닥의 카펫은 구둣발로 잔뜩 짓이겨져 있었다. "좋아요, 그러니까 당신 말로는 당신의 상관이 지금 회의 중으로 - 정말이지 그걸 믿을 것 같습니까? 제발 그 지겨운 레퍼토리 말고 그럴싸한 거라도 갖다 붙이란 말입니다!" 다시금 숨을 고르던 셜록이 자신의 머플러를 풀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회 보장 번호를 원합니까? 그거라도 안 된다면 내 발로 직접 찾아가죠." 얼마 후에 그는 입술을 잔뜩 깨문 채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고 금세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잠시 눈초리를 이리 저리 돌리던 그는 허드슨 부인의 어느 말도 듣지 않은 채 거리로 뛰쳐나가 택시를 부르더니 베이커 가를 순식간에 벗어났다.
런던 중앙의 고전 양식 건물 앞에서 택시는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드러난 훤칠한 사내는 잔뜩 부릅뜬 눈으로 계단을 걸어 문 앞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것 마냥 슬쩍 부저를 눌러댔고 열린 것은 문 대신에 위쪽에 조그맣게 나 있는 네모반듯한 쪽문이었다. 선명한 녹색빛 눈동자가 드러나더니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어왔다.
"마이크로프트. 1498호. 사건 번호는 아직 모릅니다."
그 말에 눈은 슬쩍 놀라는 눈치더니 문을 열었다. "당신...마이크로프트가 아니잖습니까." 대답도 없이 셜록은 그를 제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드높은 천장을 위로 하고 하나의 공간이 반만 나뉘어 1층에는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고 2층에는 온통 서재로 책이 가득 들여져 있었다. 19세기 특유의 아르누보 양식으로 꾸며진 건물 내부는 외부보다도 더욱 화려하고 선명했다. 카운터에 있던 남성이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는데도 셜록은 단지 건물 내부에 있는 모든 인물들을 알아보는 데에 신경 쓰고 있었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회원증이 있습니까?"
"아, 멜번!" 셜록은 금세 큰 소리로 먼발치에서 책을 읽고 있던 멜번이란 이름의 남자를 불렀다. 갈색빛 머리에 파란 눈을 한 호리호리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셜록을 알아보고 천천히 다가왔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거리만큼 남자가 다가왔을 때에 멜번은 셜록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아무리 자네라도 이런 곳에서 소리 지르는 건 용납하기 힘든 일이야."
"아는 분입니까?" 카운터에 있던 남성이 물어오자 멜번은 손짓으로 피해줄 것을 요구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이번에 새로 들여온 사람이라 자잘한 인맥은 모르는 편이야. 나가도록 하지. 그게 더 좋을 것 같군."
"난 단지 정보를 얻으면 그만이니까." 셜록은 멜번의 말의 응수했다. 두 사내는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차라도?..뭐 물론 자네 상태를 보니 그럴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마이크로프트가 어디 있는지 아나?"
"내가 아무리 그의 친구라지만 동생이 친구보단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멜번은 웃으며 말하였다. 셜록이 아무 말도 없다는 걸 눈치 채고 그는 금세 말을 돌렸다.
"출장이라더군. 그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어. 아무리 조직 간의 일이라도 세세한 일은 발설하지 않는 게 이곳 규칙이야. 적을 만들 마음이 없어도 수십 명이 나타나는 곳이니까. 비서에게는 특별히 연락해놓도록 하지. 또 '회의 중'이라고 하던가?"
"대답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셜록은 다시금 택시를 불렀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지만 그에게는 막상 가야할 곳이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별 일이군." 멜번은 웃으며 셜록을 바라보았다. "설마 네가 마이크로프트를 찾는 건 아닐 테고 말이야."
셜록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서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멜번은 그저 웃고선 다시금 건물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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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오래 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신이 의사라는 사실이죠." 마이크로프트는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남자를 알고 있습니까?"
존 앞으로 내밀어진 사진 안에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머리는 간단하게 짧고 눈빛은 그런대로 푸근했으며 옷차림도 간소했지만 표정과 태도에서 어딘지 모를 '정갈함'이 느껴졌다. 뭉툭한 코는 남자의 선한 인상을 북돋아 주었고 다부진 입은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친척이나 자식이 아니라면 그를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존은 고개를 저었다. 눈치는 당연히 모른다는 식이었다. "전혀 모릅니다."
"이 남자가 없었더라면 셜록은 지금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겁니다." 마이크로프트는 다시금 사진을 끌어와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진을 향한 은은한 눈빛이 추억을 회상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범죄를 소탕하는 사람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겠죠. 한없이 평범한 사람이지만 셜록에겐 없어선 안 될 인물이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퉁명스레 물어오는 존의 말에 마이크로프트는 슬쩍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왼편으로 치워 놓았다. "당신은 그를 순전히 '정신 나간 사내'(mad man)로 표현하고 있지만 좀 더 상세히 말해보자면 그는 '반사회성 성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APD)'입니다. 남의 감정을 공유할 줄 모르며 흔히들 '사회병질자(Sociopath)'라고도 하지요. 특징적으로 살인자나 범죄자가 많기도 합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인격인 셈이죠."
그는 잠시 책상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 시작은 아주 평범했습니다. 다섯 살 때에 주방의 은수저를 훔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결과적으로 진단받게 된 것은 이미 그가 열두 살을 넘길 때였습니다. 다행히 그때 진단받으러 간 선생님이 '심리학'이라는, 어찌 보자면 조금 생소한 학문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죠. 방금 당신이 본 이 사진 속의 사내 말입니다. 그는 특히 임상심리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반사회성 성격장애', 즉 사회병질자의 개선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금세 셜록에게 '품행장애 및 잠재적 사회병질자'라는 진단을 내리고 그를 좀 더 주의 깊게 보살펴야 한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도 좀처럼 겪기 힘든 충격적인 일이라 서도 그러하지만 이 박사, 조셉이 우리에게 그만큼 많은 지식을 숨김없이 말해주었던 탓도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나이도 지극히 어린 소년에게 그런 어려운 일에 대해 - 또한 직접적으로 그 자신의 성품에 대해 -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자면 무모할지도 모릅니다만...그만큼 셜록은 자신의 성품에 대해 크게 자각했습니다. 다른 박사들과는 다르게 조셉은 선천적인 반사회성 성격장애라도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음을 굳게 믿는 편이었고 고로 그는 셜록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범죄에서 멀어질 수 없는 이러한 성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큰 무관심과 어머니의 애정 결핍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에 죄책감을 주는 대신 그는 셜록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만들어낸 그 '직업'이란 것은 아마도 조셉의 영향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확히 어떤 과정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는 겁니까?" 존은 조금은 놀란 듯이 듣고 있다가 물어왔다.
"미안하지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너무 큰 부담과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말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의 성품에는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셜록은 조셉과의 대화로 점차 다른 모습을 보여 갔습니다. 협조적이지 않은 것은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사회 규범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지요. 문제는 아마도 그가 이후로 더욱 범죄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일 겁니다. 그는 이제 범죄를 '저지르는'것이 아니라, 범죄를 '타진하는'것으로 선회하여 범죄에 대한 온갖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범죄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적법 적이며 합리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고의 직업.
"그는 그것을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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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잘 들으렴." 어깨를 잡은 손은 한없이 따스했다. 그러나 어린 셜록에게는 그것에 대한 어떤 감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는 구속당하는 것 같아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푸근한 외모의 박사는 결코 그에게 어떤 애착이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어느 방면에서든 부당하고 괴로운 셜록에게 그는 괜찮은 제안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건을 훔치는 것이 너에게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그것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지금은 부정하는 게 중요치 않아. 아마 앞으로는 더 크고 더 중요한걸 훔치고 싶어질 테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네가 어떤 것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보다는 어떻게든 달라질 수 있는 게 중요하지. 만일 네가 엄청난 경쟁으로 이루어진 육상경기의 출발선에 섰다고 생각해 보렴. 어떤 기분이지?"
"아마 긴장되겠죠."
"네가 은수저를 훔칠 때의 기분은 그것과 같을 거야.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지. 아무도 보지 않는 것과 그 일을 행하는 것 자체가 너에게는 하나의 게임같을테니까. 셜록. 하지만 그건 너에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어. 한 순간의 즐거움일 뿐이지. 아저씨를 한 번만 믿어보렴. 반드시 너에게 더 재미있는 게임이 될 수 있을 거라 약속하마."
"...그게 뭐죠?"
"범죄에 관해선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 범죄를 '저지르는'사람과, 그것을 '뒤쫓고 분석하는'사람이지. 두 사람 모두 범죄라는 것에 얽매여 있지만 한 쪽은 자신의 인생과 남의 인생마저 망칠 수 있단다. 네가 느끼는 답답함처럼 말이야. 하지만 나머지 한 쪽은 그들을 잡아들이면서도 범죄에 가장 맞닿아 있단다. 오히려 좋은 일을 하는 셈이지. 네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분석하는' 것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면 범죄에 대해 '해결하는'지식이 얼마나 방대하고 훌륭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네가 얼마나 그 방면에 대해 모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렴. 네가 느끼는 그 답답함이란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르지. 네가 알고싶은만큼, 저지르고 싶은 만큼 알아둔다면 나중에 너는 '저지르는'사람이 아니라 '분석하고 뒤쫓는'사람이 될 수 있는 거란다. 결코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은 게임이 될 거야."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게 있다."
마이크로프트는 잔뜩 숨을 죽였다. 그는 열아홉의 장남이었으나 동생의 성격장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부족했다. "셜록보다는 네가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구나. 나중에 알게 될지 모르지만 네 동생은 새로운 자극이나 충동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한다. 차를 운전하거나, 자신의 뜻대로 무언가를 다루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지. 그건 언제든 셜록을 성급하게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야. 되도록이면 남이 운전하는 것을 타도록 하게 해라. 그리고..범죄나 그가 이미 접한 것들 외에 새로운 자극은 받아들일 수 없게 해라. 한 가지에 빠져버리면 중독될 가능성이 크니 말이다. 특히 사람과 관련된 관계, 행위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래서 생각했지요. 어머니의 당부도 그렇지만 동생을 다른 길로 인도한 조셉 박사님의 말에 따라 그를 감시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과의 동거를 지원한 겁니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당신도 박사이기에 '반사회성' 성격이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잘은 알겠지만...셜록은 특별히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를 끼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미 사건을 뒤쫓고 범인들과 대적하면서 그의 아드레날린은 충분히 그를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이며 허드슨 부인은 덕분에 그의 이상성격에서 어느 정도 물러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물론, 듣기에는 어처구니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면...제가 여기 와봤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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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총격전 속에서 문득 눈을 떴을 때의 일이다. 아직 바람은 스산했고 모래알이 손가락에 느껴져 여전히 자신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기분을 실어주었지만 몇 번이고 그 후로도 존은 '꿈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힘을 내라던 빌 머레이의 말 대신에 부디 이 모든 것이 그저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존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던 하나의 소망이었다.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지를, 그리고 그 전쟁의 희생양과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인류의 과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엔 그는 너무도 고통스러웠고 지극히 평범했다. 총탄을 쏘는 그 감각과 화약 냄새는 결코 그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못했다. 때문에 존은 그저 괴로웠고 머레이는 힘내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여자 친구는?'
'없지.'
'지갑에 있던 사진은 뭐야?'
'어머니.'
'너무 젊잖아.'
'자넨 말이 너무 많아.' 존은 일축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의 사진을 지갑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게 조금은 거슬렸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다. 먼발치에 있는 누이로부터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부모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내리꽂혔을 때 어쩌면 존은 그녀를 보지 않았기에 더욱 그녀를 이해할 수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사진속의 그녀는 오로지 하나밖에 모를 것 같이 순수하고 정갈해보였으며 극도로 치자면 성모 마리아상과도 같아 보였다.
그녀는 단지 술과 여자를 좋아할 뿐이다.
해리엇을 원망해본적은 없다. 지갑에 넣어둘 적당한 사진이 없었고 그녀는 자신의 하나뿐인 남동생이 그녀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단 사실을 마법처럼 알고 있었다. 여자 두 명이 자매처럼 찍혀있는 사진에서 존이 읽은 것은 사랑과 경애였고 결코 다른 커플과 다를 것은 없었다. 허나 다른 이들이 모두 그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게 세상이었으므로 그는 종종 '어머니와 이모'라는 존칭을 사용하곤 했다. 더 캐물어보면 답은 간단했다.
'젊은 시절이니까'.
황량한 모래밭과 오가는 총탄 사이에서 고독은 하나 둘씩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어갔고 어깨에 쏘인 탄환이 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과 이유모를 부담감은 점점 더 사랑의 의미를 왜곡시키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무심하기 짝이 없던 그의 관심이 누이의 사랑에 대해 재정의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 뜻 없이 으스러진 어깨를 부여잡고 철없는 군의관은 그런 생각에 줄곧 빠져 있기도 했다.
어깨의 탄환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했다.
언젠가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전장으로 온 편지 속에서 그녀는 남자를, 그리고 여자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레즈비언의 입장이면 하릴없어 보일 테지만 그녀는 삶이 '부담'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었다. 아이, 남편...그것들을 떠맡는 인생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지만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은 곧 사랑이라고...존은 조심스레 생각했다. 남자의 입장은 어떠한가. 한평생 아내와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삶으로 어떤 로맨스나 사치스런 감정을 지닐 수는 없는 걸까. 남자라면 그 넓은 등으로 가족을 감싸기만 해야 하는 걸까. 해리엇은 편지 속에서 그 답을 비추고 있었다. '존.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남자들에겐 모두 약한 어깨가 있어. 마치 총을 맞아서 쓸 수 없는 약한 팔처럼 말이야. 남자는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 없는 슬픈 존재들이지. 나의 친구들은 그러한 편이야. 여자는 알 수 없이 강인하기도 하고 남자들은 어둠속에서 울기도 하지...사랑받고 사랑 주는 역할을 대체 누가 정한거지? 그건 단지 '상투적인 역할극'일 뿐이야. 나는 사랑을 주는 쪽을 택한 거야. 네가 이해하는 어떤 부분도 내가 경험하는 것을 완전히 따라올 순 없겠지만...만일 너에게도 그런 연약한 부분이 있다면 이해해주었으면 좋겠어.'
사랑 받고 싶어 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존은 의아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폭격을 바라보며 생각은 한 순간에 조각났다. 피하고 싶었다. 마음 가득히, 그는 그것을 피하고 안전해지고 싶었다. 유치하고 어린애 같고 여자애 같은 생각이라며 주변의 누구든 그런 말을 할 테지만 그것은 어떠한 '의도'가 숨어있다. 누구든 죽음은 원하지 않는다. 영웅은 이제껏 수없이 많은 생명을 희생했고 모두가 그 노래를 부르며 그를 기억했으나 사실 그의 어깨도 작았을지 모른다. 어째서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 존은 문득 마음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저, 남들이 바라보기에 좋은 구실과 모습을 위해서 의사를 택했고 주변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렇게나 멀리서, 포화 속에서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온몸으로 소리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었노라고.
어깨가 욱신거렸다. 이미 아는 소리임에도 입장이 다르다보니 힘이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더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기능은 가능하겠지만 이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어깨가 작아진 기분이었다. 그 어깨로 평생을 여느 여자를 위해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한다면 부담스럽지 않은가. 그는 포탄을 피하고 싶다는 기분으로 부담을 느꼈다. 속으로 그는 토로했다. 먼지 속에 있는 자기학대의 일부 속에서 그는 사실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고 자유로운 어떤 존재에 대해 여태껏 뒤돌아 서 있었노라고. 얼굴도 본 적 없이 사진만으로 지닌 누이의 존재가 새삼 그것을 일깨운 것이다. 자신의 영혼 속에, 손을 내미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을 위해서도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싶다. 유치한 생각이 전장 속의 군의관 머리를 스쳐나갔다. 마치 총알처럼 그의 머리 깊숙이 박혔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가라는 전언이 들려왔다.
존은 그제야 자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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