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최초로 추녀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흔히들 말하기로 ‘첫인상’이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좌우되는 하나의 ‘인상’을 말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하나의 이미지에 상대의 모든 성격, 성품,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각인시키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깥을 나설 때에 치장을 하거나 귀걸이, 목걸이를 하는 이유도 어찌 보자면 이러한 ‘인상’을 위해서이며 도처에 무수한 기업의 바이어들이 말끔하게 양장을 차려입는 이유도 바로 이 ‘인상’ 때문이다. 어찌 보자면 요즘 시대에 있어서 차려입는 그 옷이나 생김새야말로 ‘나는 어떤 사람입니다’하고 말해주는 가장 분명하고 압도적인 신호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에는 소위 그러한 ‘인상’에서 우세한 이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다루어진다. 권력과 굴복, 그리고 지배의 이면에는 어떠한 ‘인상’의 보이지 않는 손이 숨어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 같이 다수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전당의 한 가운데에서 영광과 그 외의 모든 감정을 산처럼 높이 차오르도록 받은 인물들이었다. 어느 국가나 지역을 막론하고서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여러 키워드, 요컨대 ‘미인’, ‘미남’, ‘경국지색’등은 끝없이 존재하며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속에서 수많은 ‘미인’들은 독약에 죽고, 깊은 잠이 들기도 하고 자신보다 못나서 화가 난 어머니를 피해 숲속으로 도망치기도 했으며 유리 구두를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하나같이 구원당하는 멋진 주인공 역할을 도맡아왔다.
현대에 다루어지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나 앞서 다루었던 바이어의 양장차림은 우습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껏 있어왔던 수많은 역사에서 ‘인상’을 우세하게 만들 때에 거래가 곧잘 성사될 것이라는 기대조건으로서 만들어진 요소이며 그만큼 오랜 시간을, 인간은 주변을 살피는 데에 가장 유용하게 쓰이며 고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눈’의 문제로 단 하나의 개선이나 전진도 이루지 못한 채 이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인상’ ‘외모’에 대해 연속적인 스트레스 - 작가의 말로는 ‘부끄러움’ ‘부러움’ 열등감‘ -를 받아 내며 그에 대한 반작용이라도 하듯 희소적인 ’아름다움의 총체‘에게 자신의 관심(애정)을 대신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화자인 ‘나’가 애초에 느낀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지 모른다. 정신적 지주이자 그에게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는 ‘요한’이 앞서 말하지 않아도 ‘나’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느꼈던 그 절대적인 ‘인상’의 위력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어머니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관계는 ‘나’에게 끊임없는 의문과 동시에 겉모습은 아름다우나 그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는 가면속의 빈 모습을 바라보고 알 수 없는 거부감에 몸서리치게 하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동정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부부가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은
그래서 늘,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배우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미남과 그 곁에서 어딘가 모르게 머뭇하던 박색의 여인...작지만 날렵한 아버지와 크고 펑퍼짐한 어머니의 체격 차이도 분명 한몫을 했으리란 생각이다. 이상하리만치 남아 있지 않은 두 사람의 사진도, 그런 부조화를 아는 어머니의 <기피>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나’가 부모님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비단 부모님의 불공정하고 비틀린 관계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아버지가 배우라는 신념을 위해 어머니의 용돈을 가지고 맛사지를 받으러 다닌다던가 혹은 난데 없이 춤을 추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어머니의 끝없는 ‘기피’도 그러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그 수많은 ‘눈’에 있었다.
당연히, 동네 사람 모두가 어머니를 연상으로 생각했었다. 종종 주변의 아줌마들은 어머니를 시동생과 사는 여편네라고 놀렸었다.
‘외모’로 좌우되는 직업인 배우에 집착했던 아버지, 그로 인해서 자신의 못난 모습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모진 삶은 결국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더 깊어진다. 유독 아버지를 닮은 잘생긴 모습의 ‘나’는 어머니에게 오히려 그 얼굴 자체가 죄인 것 같아 스스로도 깊은 고독에 빠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을 다해왔던 어머니의 헌신이 보답 받지 못했다는 것 보다 이내 계속되어왔던 외면적인 것에 대한 절망이 더 깊었음을, 아버지가 떠나고 난 빈 자리에서 ‘나’는 느껴간다.
‘외모’ ‘인상’ 혹은 ‘잘생긴’, ‘아름다운’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 내지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래서, 그녀에게 끌렸던 것인지 모른다. 이름 한 자 나오지 않지만 매번 그의 입술 속에서 속삭여졌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명찰을 돌아봤을. 그리고 몇 번이라도, 아직 호프가 ‘희망’이었을 때 같이 옆자리에 작게나마 분홍빛으로 떠오를 그녀의 이름. 그녀의 모습이 그래서 그에게는 또 하나의 ‘어머니’였으며 빛을 받지 못해 바랬음에도 가장 화려하여 가장 비참한 백화점 뒤켠에서 짐을 오르내리는 그녀의 땀 한 방울에 가슴 저릴 정도로 ‘사랑’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값싼 동정이 되어버릴까 수없이 많은 날에서 작은 관심으로 일관하던 일상에 그는 비로소 그녀의 말 하나부터 속삭여왔는지 모른다. 비록 제 자신이 아버지는 아니고 그녀 또한 자신의 어머니도 아닐 테지만 마치 배우인 아버지가 다시금 꽃가마 타고 떠나던 장가에서 돌아와 뒤늦게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보다는 더욱 순수하고 더욱 넓고 더욱 가까이,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듯이.
아니, 아니에요.
그녀가 가장 흔히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말이다. ‘괜찮아요.’와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말이며 부정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은 마치 가장된 하나의 친절 - ‘괜찮겠어요?’ ‘이것 좀 해주겠어요? 힘들텐데...’ - 에 대한 답으로 보인다. 혹은 그녀 스스로가 ‘너는 못났어.’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저항하는 것처럼도 들리지만 그녀는 대게 남이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대답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어찌 보자면 세련되어가는 과정이자 한없이 촌스러웠던. 그래서 HOP가 HOPE고, 뒤틀린 글자 속에서 알 수 없을 정도의 안도감을 찾던. 그래서 더욱 순박했던 모습이 그녀에게 남아있다. ‘나’와 ‘그녀’ 그리고 ‘요한’이 머물던 그 오랜 시절의 수많은 개체들은 마치 하나의 회중시계처럼 태엽을 감아 맞물린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다루어지는 ‘백화점’의 모습도 그러하다. 뒤에서 일하는 그들은 하나의 ‘이면’을 담당하며 외면적인 요소에서 시작하여 외면적인 요소로 끝나버리는 흔한 남녀커플의 이야기도, 외모에 비해 무엇 하나 닮을 것이 없을 정도로 고매하기까지 한 그녀의 취미, 취향도...거꾸로 뒤틀려버린 세상에 무엇 하나 달라진다 해서 겁날 것은 없겠지만 시간은 지나가고 희망이 ‘호프’가 되어버리고 켄터키 치킨에 대한 발걸음도 사라지고 요한이 어떤 조언도 해줄 수 없는데다 어머니의 사랑은 결국 아버지에 대한 외양적 압박감이 전부였다는 생각이 ‘나’를 스쳐갈 때 즈음에
결국 그녀는 떠나버리고 만다.
‘나’는 궁극적으로 ‘그녀’가, 외면적인 요소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무관심, 비웃음에 빛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더욱이는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인간들의 저편에서 홀로 남아 휘청거리는 그녀는 관심이 없어 빛나지 않는 데다 그녀가 떠나간 빈자리를 메우기엔 한없이 얄팍한 가면이 전부일 뿐인, 그러나 그것만으로 ‘눈’을 즐겁게 하기에 그저 만사가 자연스레 풀릴 뿐인 ‘군만두’는 모든 이들의 선망과 질투를 받아 빛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로 그렇게 되었을 때에 - 군만두가 가면 속에 자리한 얄팍한 모습들을 ‘나’에게서 어느 기능도 못해냈을 때 - ‘나’는 더욱이 그녀가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진다. 이전 ‘그녀’를 비웃었던 이들을 참지 못하고 혼내줄 때에 가격했던 그 설움과 슬픔의 주먹질만큼이나 강한 힘과 마음으로
그는 눈 날리는 거리 한 복판에 서있다.
그래서 그는 그 곳에 존재한다. 발걸음, 발자국, 바람에 날리는 그의 머리카락...그 무엇 하나든 그녀를 사랑하는 모습이자 세상의 그 헛된 빛을 보내는 이들의 눈에 대해 날리는 그의 조롱이며 주장이다. 동정이라기엔 너무도 긴 세월이기에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고로 그녀를 찾았으며 추운 눈발마저 따스하게 녹여버릴 슬픈 마음 가득히 그녀를 기다린다. 한없이 철없어서, 스무살의 ‘객기’일 뿐이라 여겨질 그 시점과 그 나이와 그 시대와 희망과 호프 속에서 켄터키 치킨의 서러움을 한껏 짓밟고 그는 부모님의 사진 너머로 걸어 나와 그녀를 맞이한다. 요한에게서 받아야했던 그 수많은 조언은 그녀를 향한 ‘상상’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사랑을 준비한 것일 뿐이다. 앞서 나왔듯이 만일 그것이 수없는 ‘상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마음으로 그녀를 느끼고 추운 세상의 한 복판에서 - 그리고 눈발로 인해 모든 게 다 하나같아 보이는 - 흰 공간에서 그녀를 바라본다. 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만남은 그렇게,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지만 만남은 극히 짧다. 세월의 변화 동안에 그들은 어떻게든 머물 수 없었고 백화점의 신상품이 세일에라도 들어가듯 그들 또한 다른 값어치와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는 없었다.
이 기약 없는 이별에 대한 뒷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더 알고 싶어진다면 ‘외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마음’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이므로 완전한 ‘로맨스’를 추구한다면 한 번 정도는 염려해봐야 할 것 같다. 갈린 길에서 물론 결과는 하나이겠지만 빛을 받을 수 없어 죽은 왕녀를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보장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말대로 '최초로 추녀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사유해야 할 문제는 이것이 '추녀를 사랑한 남자의 독특함'이나 혹은 '추녀를 사랑한 남자의 궁극적 애정의 이유'따위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왜, 그것이 '최초여야만 하는지'를 사유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미인이 있지만 그에 따르는 수없는 아름답지 못한 이들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불태우는 청춘의, 시기의, 부러움의 불빛을 서로에게 보내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한다면 과연 추녀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가 '최초'일 수 있는지를, 우리는 궁극적으로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을 보고 나서도 비슷한 관점과 생각을 다룬 매체를 보고 싶다면 2007년 벨기에작 ‘블라인드’를 보기 바란다. 동화 ‘눈의 여왕’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이 영화에서 ‘나’와 ‘그녀’를 대신하기라도 한 주인공들의 애틋한 사랑과 외모에 대한 인간의 어리석은 집착에 대하여 다시금 조명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권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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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엄청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