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네 애비는 정말이지 더러운 난봉꾼이었어."
검지에 걸린 긴 담뱃대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이미 눈이라도 흩뿌리듯 담배 끝에서는 천천히 검은 재가 붉게 타들어가는 불빛 너머로 휘날리고 있었다.
"제멋대로 붙어먹은 여편네를 책임지라고도 안 해, 말 그대로 '걸레'였으니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어디서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하긴, 한 쪽 눈은 자기 것도 아니니까. 병신 얼굴이 주변을 알아먹을 리 없을 테지."
머리카락이 오래 되어 낡고 망가진 바비인형 처럼 누런빛으로 물들어서 이마까지 내려왔다. 온전치 못한 머리는 두피가 이따금씩 보였으며, 울어서 흘러내려온 검은 마스카라가 흉측한 마녀를 연상시켰다. 오래 전 유럽의 깊은 숲에서 어린 아이들을 산채로 잡아먹었다던 마녀...
숙모는 마녀임에 틀림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술을 사오지 못하거나 혹은 그녀가 원하는 만큼 골방을 내어주고 밖에서 떨지 못하면 언제든 그녀는 기어코 자신을 먹어치우고 말 것이다...공포로 얼룩졌던 그 감각은 한 해씩 나이가 차갈수록 증오로 변해 있었다.
"지루하지 않아?"
둔탁하면서도 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치열했다. 눈보라를 뚫고 지나가는 탐험가의 마음처럼 지독히도 치열했다. 오히려 그보다 더했을지 모를 일이다. 단순하게 나이를 먹는 것으로 그는 벗어날 수 없었고 마치 밑도 끝도 없는 암흑 속으로 알면서도 걸어가는 자신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끝낼 수 있다면, 혹여 그것이 -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지독한 연속성에 대한 지루함이라면야 당연히, 그는 지독하게 지루했다.
"저 학교에서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다고?"
뒤로 엄지손가락을 뻗은 채 소년이 소리쳤다. 겨우 또래 정도 되었을까 한 모습인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폼이 벌써 쉰 정도는 먹었을법한 자태였다. 목소리며 얼굴, 무엇 하나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지만 그는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온 세상의 보물지도를 가득 숨겨 놓은 사람처럼 알 수 없는 비범함을 풍겨내고 있었다.
마치 뒤에서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분에 자신마저도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누구든 그러했다. 더한 발자국을 바라지 않았고 또한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여나 그런 일이 생겨난다 해도 적극적으로 임할 예정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수없이 골방으로 드나드는 인간들이며 목을 조르고 싶은 숙모. 그리고 텅 빈 교실과 주먹과 욕, 여자밖에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도 없었다.
그래, 치열했다. 그리고 어쩌면 너무도 지루했다.
"엄마, 아빠 다 돌아가셨네."
순간 발이 멈추었다. 뒤돌아보니 서류뭉치를 든 채 낭독하듯 읽고 있다. 어눌한 음색이 유난히 거슬렸다.
"나랑 똑같아. 나도 없거든."
지독한 내용과는 다르게 소년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미소는 머지않아 사라지고 냉정한 얼굴이 자리 잡았다.
"너도 엄마를 죽였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소년은 천천히 다가왔다.
"나와 함께 가자. 돈도 많아."
소년은 자신이 메고 있던 가죽 가방을 열어보였다. 은행 강도가 훔쳐서 그대로 넘긴 것 마냥 무분별하게 놓인 지폐뭉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고 싶거나 놀고 싶거나. 아니면 누굴 죽이고 싶거나 말이야. 나처럼. 지불은 내가 할게."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소년은 눈빛을 읽은 기색이었다.
"참, 그 전에..."
소년은 말하더니 얄궂게 웃어보였다. 누구라도 그 미소를 본다면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이전에 보였던 해맑은 미소와는 상반되게 얄팍한 차가움이 감돌고 있었다.
"네 숙모를 죽이러 가자, 세바스찬 모런."
들고 있던 가죽가방의 뚜껑이 딸깍, 하고 닫혔다.